(4/6)도쿄보다 서울의 전철 개통이 먼저였다
그러므로 일본이 지금도 주장하는 ‘식민지지배에 의해 한국을 근대화 시켰다’와 같은 말은 너무도 틀린 말이다. 우선, 일본이 말하고 있는 ‘근대화’는 제도적 근대에 관한 이야기에 불과하고, 정신적 근대화인 개신교 기독교의 도의주의에 관해서는 오히려 한국국민이 일본의 억압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3·1 운동’등을 통해 스스로 확립하고 광복 후의 건국정신으로 삼은 사상이다. 현재 한국이 아시아에서 가장 개신교 기독교를 받아들인 나라인 반면에 일본은 아직껏 가톨릭과 개신교를 합쳐도 인구의 1%에도 못 미친 그야말로 가장 기독교가 발을 못 붙인 나라인 것으로도 그것을 충분이 알 수 있다.
역사문제에 있어서의 한일간의 대립에서도 그것은 현저히 나타나고 있다. 일본은 어디까지나 합리주의적인 제도적 주장만을 되풀이 하고 있다. 부정하기엔 너무 많은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이 있음에도 ‘군이 관련했다는 공문이 없다’, ‘강제 연행한 증거가 없다’라는 따위의 주장만을 반복하고 있다. 독도가 1905년이라는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상황 하에 러일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일방적으로 일본에 편입시켰다 하는 사실이 있어도 역시 ‘합법적으로 편입되었다’, ‘한국으로부터 항의가 없었다’라는 따위에 말만 하고 있다. 그것들은 모두 일본의 문화적 코드에 도의주의가 결여되어 있고 모두 ‘근대합리주의’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일찌기 한국이 이루어낸 그 근대화정신을 아직껏 배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어, 그것은 오히려 이제부터라도 한국을 통해 배워 가야만 할 것이다.
2번째로, 실제로 한국의 제도적 근대화에 대한 사실을 봐도 한국은 결코 일본에 의해 근대화 된 것이 아니라 정확히 일본에 의해 근대화의 기회를 빼앗긴 것이다.
고종황제가 아관파천에서 돌아와 1897년부터 진행한 ‘대한제국’에 의한 8년간의 ‘광무개혁’을 보자. 1899년, 국가기본법인 ‘대한국국제’를 제정하고 국고은행으로서 ‘대한천일은행’을 발족함과 동시에, 서울의 서대문-청량리 간에 노면전차까지 개통시켰다. 한편 일본은 쿄토에서 1895년에 개통시킨 것이 최초이기는 하나 도쿄는 1903년의 개통 된 것으로 수도의 전철 개통은 실로 한국 쪽이 빨랐던 것이다.
1901년에 독일 기자 겐테가 남긴 글에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줄로 여겼던 고요한 아침의 나라 국민들이 서구 신발명품을 거침없이 받아들여 서울 시내 초가집 사이를 누비며 바람을 쫓는 속도로 달리는 전차를 타고 여기저기를 구경할 수 있다니 어찌 놀랍고 부끄럽지 않으랴!”(『겐테의 한국기행』)라고 있는 그대로이다.
그 후에도, 1902년에는 중앙은행조례를 제정하고 중앙은행 건물의 설계도를 완성시키며, 현재의 주요노선이 모두 계획된 전국철도망이 착공되었고 워싱턴 D.C.를 모델로 한 서울의 도시계획도 작성되었다.
일본이 1905년 이후, 한국의 주권을 침해했기 때문에 한국인은 남대문에서 근사한 한국은행 건물을 보면 ‘일제가 세웠다’라고 느끼고 철도를 타면 ‘이것도 원래는 식민지 시대 때 일본이 깔았다’ 라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확히는 모두 대한제국 자체가 착수하고 있던 그것을 그대로 일본이 빼앗아서 추진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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